알렉스 카프의 ‘기술공화국 선언’, 그리고 피터 틸의 큰 그림
실리콘밸리의 이단아, 알렉스 카프 팔란티어(Palantir) CEO의 행보가 거침없다. 그는 더 이상 후드티를 입은 은둔의 개발자가 아니다. 서방 세계의 가치를 수호한다는 명분 아래, 그는 소프트웨어가 핵무기보다 강력한 억지력이 될 수 있음을 증명했다. 단순한 기업 확장이 아니다. 그의 책 제목처럼 사실상의 ‘기술공화국 선언(Techno-Republic Manifesto)’이다.
이 거대한 선언의 배후에는 치밀한 설계자가 있다. 바로 ‘페이팔 마피아’의 대부, 피터 틸이다. 그는 일찍이 “경쟁은 패자들을 위한 것”이라며 독점의 미학을 설파했다. 그의 설계는 비단 기업 경영에만 머물지 않는다. 지난 대선에서 자신의 제자이자 벤처캐피털 후배인 J.D. 밴스를 부통령 자리에 앉힘으로써, 틸은 마침내 실리콘밸리의 기술 권력을 워싱턴의 정치 심장부에 이식하는 데 성공했다.
이 ‘기술공화국’의 엘리트들이 겨누는 칼끝은 명확하다. 바로 ‘관료주의의 비효율’이다. 카프와 틸의 눈에 비친 현재의 정부 시스템은 낡고 비대하며 느려터진 ‘레거시(Legacy)’일 뿐이다. 그들은 묻는다. “왜 공무원 수천 명이 며칠 걸려 처리할 일을 AI는 몇 십분 만에 끝내는가?” 이 질문은 곧 행정의 알고리즘화로 이어진다. 그들에게 공무원 감축과 정부 효율화는 정치적 구호가 아니라, 국가라는 거대한 시스템의 버그(Bug)를 잡는 디버깅 과정이다.
하지만 완벽해 보이는 이 설계도에는 모순이 도사리고 있다. 바로 ‘인간의 자리’다. 카프와 틸이 주도하는 극단적 효율화는 필연적으로 ‘노동의 소멸’을 앞당긴다.
여기서 실리콘밸리는 두 갈래로 나뉜다. 챗GPT CEO 샘 올트먼은 “AI가 일자리를 없앨 것이니, 기본소득(UBI)을 주어 생계를 유지하게 하자”고 주장한다. 기술이 번 돈을 N분의 1로 나누어주자는 일종의 ‘기술적 사회주의’다.
반면, 피터 틸과 J.D. 밴스의 노선은 다르다. 보수적 가치를 중시하는 그들은 사람을 수동적인 현금 수급자로 만드는 것을 경계한다. 밴스는 줄곧 ‘노동의 존엄’을 강조하며, 미국인이 땀 흘려 일할 때 국가가 건강해진다고 믿는다.
바로 이 지점에 기술공화국의 딜레마가 있다. 그들은 비효율적인 관료와 화이트칼라를 AI로 대체하기를 원하면서, 동시에 국민들이 ‘존엄하게 노동’하기를 바란다. 일터가 알고리즘으로 대체된 세상에서, 과연 그들이 말하는 존엄한 노동은 어디에 존재하는가? 결국 그들도 싫어하는 기본소득의 길로 떠밀려 갈 것인가, 아니면 우리가 알지 못하는 새로운 통제 시스템을 준비하고 있는가.
피터 틸의 설계와 알렉스 카프의 실행력, 그리고 J.D. 밴스라는 정치적 파이프라인은 이제 미국을 거대한 ‘스타트업’처럼 개조하려 들 것이다. 효율성은 극대화될 것이고, 국가는 거대한 플랫폼이 될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질문해야 한다. 우리는 이 기술공화국의 ‘주권자’인가, 아니면 최적화된 시스템 속의 ‘부속품’에 불과한가. 알렉스 카프의 선언은 먼 미래의 공상과학이 아니다. 우리 눈앞에서 펼쳐지고 있는 현실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