약국 없는 세상이 온다 - 제약사의 '직배송' 반란
최근 월스트리트 저널에 실린 제약 업계의 뉴스가 심상치 않다. 거대 제약사들이 그동안 공생 관계였던 중간 유통업체들을 건너뛰고, 환자에게 직접 약을 팔겠다고 선언했기 때문이다. 한인들에게도 친숙한 비만 치료제 기업들, 일라이 릴리(Eli Lilly)와 노보 노디스크(Novo Nordisk)가 그 주인공이다. 이 사건은 단순한 기업 뉴스를 넘어, 우리가 약을 소비하는 방식과 가정 경제에 직접적인 영향을 줄 수 있는 거대한 변화의 신호탄이다.
제약사들이 수십 년간 유지해 온 유통 관행을 깨부수게 된 결정적인 원인은 바로 미국의 기형적인 약값 구조, 그 중심에 있는 ‘PBM(Pharmacy Benefit Manager, 처방약 급여 관리업체)’ 때문이다. 제약사가 약을 많이 팔려면 보험사의 처방 목록에 등재되어야 하는데, 이 권한을 쥐고 있는 PBM은 제약사에게 목록 등재를 대가로 막대한 리베이트를 요구해 왔다. 이른바 ‘리베이트 덫’이다. 제약사는 이 비용을 충당하기 위해 약의 정가(List Price)를 일부러 높게 책정했고, 그 피해는 고스란히 보험이 없거나 자기부담금(Deductible)이 높은 환자들에게 전가되었다. 정작 약을 만든 제약사도, 약을 사는 환자도 아닌 중간 유통업자가 가장 큰 이득을 보는 불합리한 구조가 고착화되어 있었다.
결국 “더 이상은 못 참겠다”는 제약사들의 불만이 폭발했고, 기술의 발전은 이들에게 ‘독자 생존’의 길을 열어주었다. 일라이 릴리는 ‘릴리다이렉트(LillyDirect)’라는 자체 플랫폼을 통해 반란의 깃발을 들었다. 복잡한 중간 단계를 모두 생략하고, 환자가 웹사이트에서 의사의 처방을 받아 주문하면 제약사가 집 앞까지 약을 직접 배송해 주는 방식이다.
가장 놀라운 변화는 가격이다. 중간 마진과 리베이트 거품이 사라지자 약값이 반값으로 줄었다. 월 1,000달러가 넘는 인기 비만 치료제들을 직판 모델을 통하면 절반 수준인 399달러에서 550달러 선에 구매할 수 있게 됐다. 없어서 못 판다는 ‘꿈의 다이어트 약’을 더 저렴하고 편리하게 구할 수 있게 되자 소비자들은 환호하고 있다. 의료비 부담이 만만치 않은 미국 생활에서, 특히 고액 공제액(High Deductible) 플랜을 가진 가정에게는 가뭄의 단비 같은 소식이다.
물론 기득권의 반발도 거세다. 발등에 불이 떨어진 대형 약국 체인과 PBM들은 즉각 견제에 나섰다. 미국 최대 약국 체인이자 거대 PBM을 소유한 CVS 헬스는 일라이 릴리의 약을 추천 목록에서 제외하는 등 실력 행사를 시작했다. 이에 질세라 일라이 릴리는 약품 관리 대행사를 CVS에서 다른 곳으로 바꿔버리며 강하게 맞서고 있다. 바야흐로 제약사와 유통 공룡 간의 전면전이 시작된 셈이다.
이 전쟁의 결과는 앞으로 우리 삶을 어떻게 바꿀까? 전문가들은 의료 쇼핑의 ‘아마존화’가 가속화될 것으로 내다본다. 이제 약도 아마존에서 물건을 사듯 ‘브랜드 공식 몰’에서 사는 시대가 열리고 있다. 이는 약품 가격의 투명성을 높이고, 소비자의 선택권을 강화할 것이다. 이미 일라이 릴리와 노보 노디스크뿐만 아니라 화이자(Pfizer) 등 다른 거대 제약사들도 유사한 직판 모델을 준비 중이라는 소식이다.
월스트리트 저널의 이번 보도는 유통의 거품을 걷어내고 소비자와 직접 만나는 것, 이것이 모든 비즈니스의 종착역임을 보여주는 사례다. 제약사가 약국을 패싱(Passing) 하는 세상. 누군가에게는 위기겠지만, 혁신을 기다려온 환자들에게는 새로운 혜택의 문이 열리고 있다. 약국에서 줄을 서는 대신 집에서 클릭 한 번으로 처방약을 받는 풍경, 그것이 곧 다가올 미국의 새로운 일상이 될지도 모른다.


